르네상스의뜻

르네상스란 '부활' 또는 '재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원래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가 쓴 저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르네상스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유럽의 전통 문화인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재생 또는 부활한다.'는 뜻이다.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대 로마의 무화를 되찾으려는 의욕이 강했지만, 거기에는 전통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단순한 복고 정신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가 들어 있다. 곧 중세 크리스트 교회가 인간성을 없애고 신의 권위만을 강조해 왔던 탓으로 이 시대의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인간 중심의 생활을 다시 찾으려는 욕구가 보다 강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르네상스를 인간 중심의 문화 또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도 한다.


르네상스미술의 발생

르네상스의 문화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문화는 교회 중심의 미술을 비롯하여 문학.학문.과학 등 전반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교통의 요충지로 동방 제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상업이 번창했으며, 서민들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화도 급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 시기에도 크리스트교가 상당한 지배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신 중심에서 인간을 위한 교회로 변하였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가 인간성에 대한 자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사정이 점차 어려워져 민간인의 후원으로 교회가 건설되는 등 서민층의 역할이 확대됨으로써 서민 중심의 근대 사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이유의 하나이다. 따라서 교회의 건축이나 내부 장식이 성직자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졌던 것에서 점차 전문 직업인이나 예술가의 개성에 따라 만들었다.


르네상스미술의특색

르네상스의 미술 양식은 서양 미술사에 나타난 한 시대의 특징에 지나지 않으나 근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시각적인 특징보다는 르네상스가 다음 시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또 표현의 특색을 통해 그 시대의 인간 정신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 건축뿐만 아니라 일반 공공 건물도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건축에서 조각과 회화가 독립되어 하나의 미술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과학적인 발달로 회화에서는 원근법이 발달하였고, 조각은 사물로서 입체가 아니라 공간감을 나타내는 미술로 발달하였다.

조각이나 회화는 주로 종교적인 내용이지만 중세의 표현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즉 예수나 마리아의 모습을 인간과 똑같이 자애롭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고딕식 첨탑이 사라지고, 그리스나 로마식의 안정감 있고 균제의 미를 지닌 건축 양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자면 르네상스의 6가지 특징을 정리할수 있다.
 1.공간의 영상:(입체적 영상)-평면에 실제감의 중요 요소인 공간감을 나타내는것
                                          -원근법(색채원근,기하학적 원근)
2.신체성의 영상(사물 본질 모양)
3.물질성의영상-재질감
4.해부학적 비례 정확성
5.묘형의세부-사물을 그릴때 자세한 표현
6.대상의 색채

초기 르네상스 회화 (15세기)

15세기 르네상스 회화는 현실적인 자연에 대한 관찰과 해석으로 그 첫째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체묘사와 공간 묘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평평한 화면에 깊이 있는 공간을 재현시킴으로써 중세적인 상징적 공간에 머물지않고 실제로 우리들에게 보이는것과 같은 공간 감각을 지니게 한다. 한편 그속에 그려져있는 인간들은 빛(명암)과 그림자 및 색채와 더불어 보다 양감있는 입체적인 조형성을 띠고 나타나서 가시적인 현실감을 회화적으로 높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물론 르네상스라는 근세의 새로운시대에 살게 된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기 시작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보다 높은 관심에서 연유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편 이러한 관심은 실제적으로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점을 주관에 대립되는 객관적인 세계에 두게 하고 이것을 주관과의 한 연관성 속에 파악하게 해 주었다. 이와 같은 연관성의 상관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다름아닌 원근법의 적용이다.


원근법은 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이러한 원근법의 발견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이며 그 인식 내용을 실험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알베르티다. 알베르티는 그의 <회화론>(1435)에서 회화이 과학적 요소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화가에게 불가결한 지식으로서 수학적 기본 개념이나 원근법적 표현을 위한 기하학의 지식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외적 세계에 대한 15세기 르네상스인들의 깊은 관심과 과학적인 기본 태도는 인간 자신의 표현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중세 교회의 권위에 대해 회의하고 현실적인 삶에 집착하기 시작한 근세 초기의 인간들은 이 지상 위에 삶을 영위하는 자각한 인간의 개별상으로서 종교화 내지 자화상 또는 초상화를 맏이 남기 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 세기에는 측면상의 형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고대에서 발견한 기본 형식을 답습하면서도 자신에 찬 인간 개개의 상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이러한 개별 인간의 상을 넘어서서 일반적인 또는 이상적인 인간의 상으로서 나체상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신화나 전설 또는 종교적인 주제를 통해 표현되고 있음이 보통이다. 원래 고대 그리이스의 나체 조각 이래로 서양에서는 진실되고 아름다운 형체가 가지는 보편적인 비례를 다름아닌 인간의 나체상에서 찾았다. 이 전통은 중세라는 상징적인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회복된 것이지만 이때에 와서는 고대의 이상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보다 생기 있고 유기적이고 구조적인 인간상의 표철으로 발전하게 된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찾아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일편의 세속적인 근대적 정신은 교회나 종교의 예속에서부터 점차로 예술가를 해방시켜 예술가의 상상과 주관에 의한 예술 창조에 로의 새로운 길을 터놓았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다름아닌 근대의 인문주의적 교양이며, 그 교양을 가진 인문주의자들 이다.


교회나 종교의 속박에서 독립하게 되는 예술은 그 잃어버린 기반과 권위를 바로 이곳에서 되찾게 된다. 그것은 또한 예술의 성장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인격이나 사회적 지위도 높여 주게 되었다. 이에서 오는 고대나 고대화된 신화, 전설, 역사 및 우의에 찬 모티프들은 그 고상하고 흥미깊은 르네상스 회화에 보다 많은 주제를 제공했고 심지어 종교적인 성질의 그림에까지 서슴 없이 침투해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서 르네상스 회화의 세속성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다.



▣ 르네상스 - 피렌체 화파

I5세기 르네상스 회화는 먼저 피렌체 화가 마사치오에서부터 비롯된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 벽화엔 계속되고 동일화된 공간 속에 공기와 명암과 색채의 효과를 타고 양감 있는 인체들이 유기적인 간격을 사이에 끼고 장엄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아직도 중세적인 상징의 세계에 머물고 있던 당시의 일반적인 회화의 취향은 새 시대를 여는 이와 같은 현실주의에 그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우첼로, 베네치아노, 발도비 네티,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기를란다이오 등의 화가들은 자연의 과학적인 파악에 의한 사실적인 표현 방식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가는 경향을 주도했다. 한편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혹은 보티첼리와 같은 온건한 작가는 그러한 사실적인 경향을 지향하면서도 차분하고 부드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정성을 지니기도 하는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 르네상스 - 움부리아 화파

이와 같은 피렌체 화파 이외에도 풍경과 건축적 요소와 투시화법의 결합을 통해 특유한 모뉴먼틀한 화면을 남긴 움부리아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 보다 부 드럽고 종교적인 그림을 그려 이름을 얻게 된 페루지노, 그의 조수로 장식적인 그림 효과에 능한 핀투리치오 등의 중부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들이 있지만 이들은 대개 피렌체에 직접 나가거나 아니면 간접적으로 접함으로써 역시 그들의 영향권 내에 속하고 있었다.


▣ 르네상스 - 베네치아 화파

회화의 또 다른 중요한 중심지를 찾는다면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빠뜨릴 수 없다. 여기에 대표되는 화가로는 다름아닌 야코포 벨리니와 그의 두 아들, 젠틸레 벨리니와 지오반니 벨리니로 이어지는 벨리니 일가다. 그들을 비롯한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은 호화로운 장식이나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 내지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과 풍만한 인체의 표현을 통해서 다음 세기의 여러 작가들에게 이어졌다. 또한 이곳에 연관을 가졌던 중요한 작가로 인물의 조소적인 파악과 축소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만테냐나 맑은 색채를 사용한 메시나 등을 빼놓을 수 없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는 1490년대 초반에서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객관적 사실주의를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품격 높은 고차원적인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특히 1480년~1520년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고전적」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위대한 미술의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거니와, 그리고 그 주역이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이다.


자각한 인간과 대응되는 객관적 세계로서의 자연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데 몰두했던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바로 그런 점에서 그 이전 시대인 중세 고딕으로부터 되도록 이탈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이 세기 후반에 가까와지면서 레오나르도 다 만치를 선두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특유한 세계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 새 예술의 특징을 우리는 한마디로 고전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겠다. 이제 모든 회화 내용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통일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양한 변화와 이질적 요소의 상호 작용은 조화외 균형을 갖춘 새로운 조형 원리를 성립시켰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현은 새로운 미를 간결한 화면 위에 창조해 냈다.


16세기 회화는 그 근원을 어디까지나 자연주의에 두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일단 긍정한 전제 위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과 차후 작품을 비교하는 데서 잘 드러 난다. 물체의 고정색을 부정 하거나 <암굴의 성모>에서 처럼 스푸마토(sfumato :대기 속으로 연기가 스미듯, 명암을 조정하여 극히 섬세하게 변화시키는 기법)라는 특유한 원근법을 사용하여 표현 대상을 그 내면에서부터 이상화시킴으로써 보다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종교화와 고전적 주제의 그림 모두에 해당되는 경향이었다(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등). 그리하여 마침내 회화는 가장 고귀한 예술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낳는 화가는 신에 대신하는 창조적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레오나르도). 이들이 완성한 예술 세계는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을 완전히 새롭게 규명지음으로써, 모든 인간의 자태와 움직임은 그것이 세속적인 그림의 것이건 종교적인 그림의 것이건 간에 이와 같은 감정을 북돋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 그림에서는 그동안 부분적인 배경으로 등장해왔던 풍경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인물상을 감싸며 풍부한 장식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 주목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보다 더 회화적인 분위기를 붇돋아 줌으로써 회화예술의 새로운 국면을 펼쳐놓았다. 회화 내에서 풍경이 차지하는 이와같은 의미는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에서 많이 나타난다. 감정의 반영으로 나타나는 풍경을 바로 인간의 감정세계와 하나로 융합시킴으로써 특유한 아름다운 회화 세계를 펼쳐놓았다.


그러나 결국 어느 주제의 작품이건 어느 작가의 자품이건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특히 16세기 회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다름아닌 인체, 그것도 반나 내지는 전나의 인간상이다. 또한 이 시기의 작가들이 표현의 주요 대상을 인간의 상에 두고 있음을 이로써 잘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노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 -1564) 는 1475년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0세때 피렌체 시내 프란체스코 울비노 학교에 들어가나 학교 공부보다 지옷토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해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부친은 그들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에 못마땅해 했다.


13살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디오는 그 당시의 부유한 피렌체 시민 계급의 생활을 명쾌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해준 화가이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된다.


1489년부터 그는 당시 피렌체시의 권력자인 메디치가가 세운 조각학교에서 도나텔로 제자인 베르톨도로 부터 조각도 배우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1496년 로마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을 제작하고 피렌체에서는 '다비드'상을 1504년에 완성하여, 많은 사람들로 부터 찬사 를 받는다. 1512년에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천지창조'를 4년여만에 완성했으며, 그 후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말년에는 건축에 몰두하여 '피터 성당'의 둥근 지붕 설계,'포타피아'에 대한 설계와 연구 등이 있으며 생존 마지막 기간 중에는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을 조각했는데 거의 죽어가는 순간까지 이 작품들을 조각하였다. 1564년 2월18일 미켈란젤로는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 플로렌스에 묻히기를 원하였기에,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린시절 친구로 부터 입은 코의 상처가 그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한 동기가 되었을 정도로 편협하고 외곬수적이었으나 자신의 생김새에 대한 열등감으로 오히려 아름다운 인체를 생명력이 넘치게 표출해 내는데 정열을 쏟아부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1452년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466년 피렌체에 가서, 베로키오 의 공방에서 회화· 조각을 수업받았다. <그리스도의 세례>그림 가운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렸다고 하는 일화는 이 화실에 있었던 무렵의 일이다. 사실 베로키오는 그 후 조각에 전념하였다.


30세때 화가, 건축가로서는 둘째치고 군사 기술 전문가로서 밀라노 대공에게 초청되어 그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 당시 손을 대고 있던 <동방박사의 경배>는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아야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보티첼리와 달리 윤곽보다도 빛에 의해 다양하게 시각화되는 인체의 조소적 효과를 표현하려했다.


밀라노에 도착하자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암굴의 성모>를 시작했으며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동방박사의 경배>나<암굴의 성모>는 독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초기르네상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12년 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의 최초의 고전적 표현이라 한다. 중앙의 인물 그리스도 뒤쪽에 소실점이 있어 공간감과 원근감이 잘 나타난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에 구애받는 것이 싫어 템페라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벽에 잘 붙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


<모나리자>는 <암굴의 성모>에서 이미 주목한 미묘한 스푸마토가 이 회화에서 완성을 보였다. 형태가 극히 엷고 섬세한 겉칠의 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화면 전체가 부드러운 빛으로 빛나고 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 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만년에 이르러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 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 회화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 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 <삼 미신>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 된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건축에도 손을 대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풍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 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Posted by hi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