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포괄적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싸이에 올린적이 있다..
실로 간만에 이글을 다시 점검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요즘 예슐계의 침체이다.
인사동과 사간동 각종 미술관들...그리고 몸 언어를 구사하는 무용수들의 발표회장도 글을 보아도 혹은 미디어를 보아도 일정 급 발전적인 동향을 보이던 모습들이 경기 침체와 동시에 같이 추락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평면화된 간혹 입체적 성향을 띄는 작업을 하는 나조차도 지금은 마치 수렁에 빠진듯 그림 이라는 장르를 범접치 못하고 있다.
지금의 예술계의 모양을 보자면 스타가 필요하다.
단순 이슈가 아닌 뭔가 정점을 찍고 흔들수 있는 진정한 스타가 필요한듯 보인다.
마치 항해중 나침반을 찍어줄 항해사가 필요하듯 말이다.
자그럼 글을 다시 점검해보자.

언어냐 그림이냐 혹은 육체적 표현 음악 어느 한 범주를 잘라내어 예술의 정의를 완벽히 정립할 수는 없다.
모든 표현 언어가 결국은 같은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주제 혹은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표현수단을 무엇으로 하였는가의 분류는 할 수 있으나 결국 표현되어 나오는 산물은 같은 이야기를 하며 같은 감성과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를 나누고 그 나름 데로의 정의를 내리지만 서로의 범주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정의 속에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나 주제는 일괄 상통하고 있다.


우리가 실수 할 수 있는 부분은 고정 관념이나 기존에 정립되어 교육을 받음으로써 이것은 이것이다 라고 암시적 정의가 내려져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풀잎을 놓고 페인팅 등의 범주에서는 녹색이나 연두색을 연상하며 육체적 언어로는 최대한 새싹이라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등을 표현하고 언어적 표현수단으로는 지금 씌여 지고 있는 것들을 포괄하여 표현한다.


시각과 지각에 대한 호소는 갤러리이던 책이던 혹은 무대 위 거리를 막론하고 관객을 필요로하며 동원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각기 다른 혹은 공통된 반응이나 호응을 유도해 내고 이를 통틀어 종합 예술의 범주에 넣어지고 있다.

누가 예술가이고 누가 관객이냐의 범주 마져도 현시대에서는 무의미한 개념으로 들어간다.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서 그들의 반응이나 참여가 매우 중대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방법도 많이 모색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소극적 관객 즉 화가 혹은 오페라 가수 무용수들 책등의 산 유물을 단지 감상하는 철저한 분리된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들이 있어야만 완벽히 표현 되어지고 있는 작품이 속속히 표현되어지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거울의 집에 관객이 들어가 그 모습이 어떠한 움직임을 가지건 어떠한 눈빛과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던 간에 거울 속을 관객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봄으로써 거울 집 안의 작품이 완성되어지는 것)
미디어의 발달과 네트워크의 급격한 발전은 예술에 있어서도 급격한 발전과 변태를 유발하였으며 같이 나아가고 있다.
많은 신 표현 방법이 나왔으며 (미디어-백 남준, 페인팅-출력을 이용한 멀티 작업, 영화-독립영화. 실험영화, 사진 등등..) 이는 예술의 대중성을 확산 시켰다.
그러나 그 반면 순수 예술의 범주를 매우 애매모호하게 만들었으며 요 근래에 들어와 순수 에 대한 향수를 다시 일으키고 있다.
페인팅 작가들은 다시 적극적으로 붓을 들었으며 판화작가들은 순수 판 종을 다루는 등 적극적으로 향수에 젖어들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단순히 과거의 향수에 의한 고전적 작업들이 얼마나 융화를 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로써는 고루하고 지루함을 느낄 수도 으며 이는 어느 정도는 과부화적인 현상이 있을 수도 있다.
마치 제 3공간 안에 각기 다른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 듯 과거와 현재가 혼동 혹은 나름 데로의 질서를 유지하며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 예술 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면서도 풀어야할 숙제일 것이다.

Posted by hipi